두 아 디 라(Thyarira)교회는 책망과 축복을 같이 받는다(계 2:18-29). 즉, 우상(이세벨)의 제물을 먹으며 간음과 약속
의 교훈을 버린 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명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난에 던지고 그 자녀들을 죽이리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나을 것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리라고 약속한다. 그런 두아디라교회가 주목 받게 되는 것은 루디아(Lidia)가 이 성읍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 성읍은 지금은 악히사르(Akhisar)라는 소도시로 전락했지만, 주전 3세기경에 시리아왕 셀레우코스 니카드로(Seleucos Nicator) 1세가 세운 도시다. 그런 이유로 마게도니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이주해 와 살았다. 얼마 후인 BC 190년경에는 로마군에게 패배하고 버가모 왕조가 다스리다가 다시 로마의 속주로 넘어간다.

버가모는 아시아의 수도로서 정치적 중심지이고, 서머나는 지중해를 지배하는 해양의 요충지다. 그러므로 이 두 도시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두아디라 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셀주크 터키나 쿠르드족의 침략이 있을 때 첫 번째 성 두아디라를 넘지 않고서는 서머나난 버가모를 공격할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아디라를 정복하고 나면 양군의 군사력은 소모되어 약해진다. 그러나 로마군은 버가모나 서머나에서 지원군이 쉽게 도착할 수 있어 약해진 군사력을
보강하게 된다. 전술가에 의하면, 방어 및 전진 기지가 두아디라 성에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급 면직물(자주 옷감)이 생산, 수출되며 여러 지방의 도시마다 무역의 길을 열어놓고 정보 수집도 해왔다고 한다. 버가모에서는 동남쪽으로 80킬로미터 지점에, 사데에서는 6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두아디라는 1571년 투르크의 침략으로 방어선의 흔적마저 사라졌다.

다만 요한서신(계시록)을 받아 볼 수 있는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한다. 교회 역사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와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 두아디라교회의 대표(감독)들이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환난의 세월이 수없이 지나갔지만, 그 교회의 터와 기둥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두아디라라는 도시의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주변에 시골스러운 주택이 들어서고 있어, 그마저도 쓸어 없애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방무하고 데린쿠유(지하 도시)로 바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