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교회
에베소(Ephesus)는 기독교 역사상 안디옥교회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사도 요한이 가르치고 또한 사도 바울이 2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성경을 가르친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뒤를 이어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게 했다.(딤 전 1:3-7). 다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은 하나님의 경륜보다 말다툼만 하게 하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지 말 것, 예
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직분을 맡겼으니 믿는 자의 본이 되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질 것, 그리고 다른 교훈을 가라치지 말 것 등이다.

이후 교회사는 431년 에베소에서 에베소 공의회(The Council of Ephesus)를 소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공의회가 소집된 것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안디옥 신학파와 키릴로스(Kyrillos)의 알렉산드리아파 사이에 교리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문제를 의제로 다룬 것이다. 에베소에는 요한 기념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에베소 공의회가 열렸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만으로도 요한 교회당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콘스탄틴 대왕의 정치적인 용납(밀라노 칙령)으로 세운 교회이니만큼 힘과 정성과 지혜를 다해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야외 대극장을 지나 셀서스 2세(Celsus II) 도서관에 이르렀다. 이 도서관은 125년에 완공되었는데 지금은 앞부분만 남아있다. 셀서스의 아들 아프일라(Apuila)는 부친의 묘지 위에 도서관을 짓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완공했다.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고 해서 셀서스(Tiberius Julius celsus) 도서관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지만, 그것은 억지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셀서스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더불어 제국의 2대 도서관
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또한 예베소는 로마제국 4대 도시 중의 하나인데 그 한복판에서 바울이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언덕길을 따라 마지막 지점에 오르자 "누가의 묘"라는 안내판이 있다. 한글로 된 안내판을 보니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누가는 "사랑받는 의사"라고 말하는 것이 편하다.

모세의 설명에 따르면, 누가는 로마인 백부장 종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느날 백부장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집이 타고 있을 때 누가의 아버지가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백부장의 책과 귀중품을 들고 나온다. 불은 집 전체를 덮었다. 그래도 더 남은 것들을 건지러 들어갔다가 그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불길에 목숨을 잃는다. 백부장이 돌아와 전소된 집을 보고 누가의 아버지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사건을 알고 난 백부장은 누가를 양자로 삼고 공부를 시킨다. 훗날 누가는 의학을 전공하여 의사가 된다. 병들어 죽어가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착하고 겸손한 마음을 소유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생동안 복음 전하는 일에 드리기로 작정하고 바울을 따라 나선다. 바울과의 동행은 드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사도행전의 기록은 그 이전부터 일어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떠날날이 가까워 오자 디모데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낸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9-11).

누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바울과 함께 있었다. 누가는 행전을 기록하고 정리하여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바울은 순교한다. 훗날 누가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어쨌든 누가의 묘가 여기에 있다. 성묘하듯 묘를 한 바퀴 돌아보고, 우리는 요한의 무덤이 있다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라오디게아교회
라오디게아(Raodecea)는 데니즐리와 파묵칼레 사이에 있는 곳으로 주전 2천여 년 전에 이오니아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BC 1900년 경에는 히타이트(헷족) 사람들에 의해 도시가 확정되고, 부르기아와 리디아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이후 BC 250년경 셀레우코스의 왕 안티오쿠스 2세가 재건립하고, 그의 부인인 라오디케의 이름을 붙여 라오디게아로 부르게 되었다. 

히에라볼리의 넓은 들녘이 있는 이곳은 교통과 사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면, 면직물과 의약품(특히 고약과 안약)이 생산되고 각처의 상인들이 몰려 드는 무역 도시로서 매우 부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부족함이 없다는 이곳의 자만에 대해 주의 사자는 이렇게 책망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갑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 그러나 그 책망은 사랑하는 자의 책망이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명령한다."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13:20). 

오늘 로마인이 남긴 라오디게아의 유적지에는 원형 경기장과 육상 경기장, 황제 하드리아노의 신전과 알 수 없는 유적들이 널려 있다. 혹시나 하고 교회 유적지를 찾아보는데 그럴만한 곳은 없고 십자가가 조각된 대리석 조각만
보였다. 사람들은 대리석 조각이 있던 그 자리를 라오디게아교회 터라고 하는데, 그곳 역시 교회 터와 연결지으려는 생각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부요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왜 교회가 없었겠는가? 다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지하교회로 존재했을 뿐이라고 여겨진다.

바울은 제자 에바브라가 모임의 주도자요 눔바(Nympha)의 도움이 있었다고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골 4:13-16). 이 서신 역시 두기고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가지고 온 바울의 친서이다.